말로써 행복을  [제93회] 새해 인사: 말처럼 힘껏 달려가겠습니다.

                                                                                                                          권재일(한글학회 이사장)

2026년 새해를 맞이하여 저의 글 “말로써 행복을” 독자 여러분께서 늘 건강하시고 펼치시는 일마다 보람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아울러 지난해에도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꾸고 지키는 데 관심을 가지시어 저의 글을 애독해 주신 여러분께 가슴 깊이 고마움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 고마운 마음을 담아 올해도 모든 국민들이 우리 말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바르게 사용하도록 온 힘을 모아 글을 쓰겠습니다.

 

새해 여러 방송의 뉴스는 한결같이 “병오년, 말의 해가 밝았습니다. 말은 활력과 정열의 상징입니다. 올 한 해가 활기찬 한 해가 되길 기원합니다.”로 시작하였습니다. 이제 저도 여러분과 함께 새해에 우리말과 우리글의 가치를 높이고 올곧게 사용하도록, 힘껏 말을 달려 보겠습니다.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

[사진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말≫]

한글학회는 도대체

뭘 하고 있습니까?

 

크고 작은 모임에 가면 참석자들이 저에게 하는 말씀이 늘 같습니다. “한글학회는 도대체 뭐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알아듣지도 못하는 외국어가 난무하고 거리의 간판이 영어 투성이인데 그냥 앉아 계십니까?”

물론 한글학회를 비롯한 한글문화연대와 같은 국어 관련 단체가 가만 앉아 있지는 않지만, 우선 가만 앉아 있어 죄송하다고 그분들의 안타까움을 가라앉힙니다. 이렇게 우리말과 우리글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기쁘고 고맙다고 말씀드립니다.

 

왜 저흰들 가만히 앉아 있겠습니까? 행정기관을 설득하고 언론사에 협력을 구하면서 수십 년 동안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활동을 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일상생활 언어에서 외국어를 마구 섞어 쓰는 일이 줄어들기는커녕,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만 갑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우리말은 품위가 없고 외국어는 품위가 있다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물론 저희의 노력이 부족한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외국어를 마구 섞어 쓰는 일을 행정기관과 언론사가 앞장서고 있으니 저희로서는 힘에 부칠 수밖에 없습니다.

 

‘맘프러너창업스쿨’과

“여성 새로 일하기 사업”

 

먼저 행정기관의 외국어 마구 쓰기 예를 들어볼까요? 제가 사는 서울특별시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십여 년 전 일입니다. 서울시가 야심 차게 내놓은 정책이 있었습니다. ‘맘프러너창업스쿨’. 정작 이 정책을 필요로 하는 여성분들은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결혼으로 경제활동이 끊긴 주부들의 창업을 돕기 위해 마련한 제도라 합니다. ‘맘’과 기업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앙트프러너’의 합성어라고 풀이하였습니다. 처음부터 정책 이름에 알기 쉽고 정확한 뜻을 담았더라면 새로 일하려는 여성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을 텐데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사업을 서울시에서 “여성 새로일하기 사업”이라고 합니다. 때 늦은 감이 있지만, 쉬운 표현으로 사업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리려는 서울시의 이러한 획기적인 변신에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현재 서울시 여성일자리 지원 사업의 표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울 우먼 UP! 희망 UP! 일자리 UP!

 

중장년 일자리 서비스는 “서울런 4050”이며, “디지털 페르소나 유형 테스트”는 무슨 사업인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2026년 서울 색은 모닝옐로우로 정했다고 합니다. 모닝옐로우는 매일 아침 떠오르며 서울시민의 하루를 여는 아침해에서 추출한 색으로, 2024년 스카이코랄(한강 노을), 2025년 그린오로라(긴 여름밤 가로수)에 이어 서울시민의 일상·정서·트렌드를 반영한 서울 색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읽어도 참 어려운 색깔입니다.

 

서울시는 올겨울에 판타시아 서울을 주제로 초대형 겨울 축제 ‘2025 서울윈터페스타’를 개최합니다. 먼저 광화문광장에서 미디어파사드 전시인 ‘2025 서울라이트 광화문’을 개최합니다. ‘베셀레 바노체!’ 전시, ‘봄ON한강’ 축제도 개최합니다. (이런 외국어 투성이 가운데서 서울빛초롱축제, 한강바람축제도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서울광장에서는 Winter Ring스케이트장을 운영하며, 주변에는 로컬마켓존을 만들어 지역의 특별한 농특산물도 만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세계는 서로 문화를 주고받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든 외래문화가 들어옵니다. 외래문화가 들어올 때는 당연히 새로운 단어가 따라 들어옵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서, 즉 버젓이 우리말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어를 섞어 즐겨 사용하는 것은 우리말을 어지럽힙니다. 이는 언어의 기능인 의사소통 능력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우리 얼과 문화를 어지럽힙니다.

 

그래서 저의 독자분들이 저에게 또 묻습니다. 그걸 알면서 왜 가만히 앉아 있느냐, 가서 따지든지, 가르치든지 해야지, 추궁합니다. 그러나 행정기관이 불필요한 외국어를 사용한 예를 찾아 분석하고 대안까지 마련해 가지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낯선 외국어를 쓰면 일반 국민은 정부 정책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으며, 때로는 그 뜻을 잘못 이해하여 피해를 볼 수도 있으니, 행정기관이 사용하는 언어는 훨씬 쉽고 정확해야 한다고 설득해 보지만 성과는 없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희 한글학회는 연세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도 알아들을 수 있는 행정기관의 언어가 실현될 때까지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멀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신문의 언어는 어떨까요?

 

아침 신문을 봅니다. “뉴노멀된 1400원대 고환율”, “닥터둠 김OO 교수는 코스피가 3500 밑으로 떨어질 것이라 하였다.”

‘뉴노멀’은 알겠는데, ‘닥터둠’은 저에게 무척 낯섭니다. ‘닥터둠’은 ‘비관적 경제론자’라고 하는군요. ‘액션플랜’, ‘옵트아웃’, ‘스튜어드십코드’라는 외국어도 눈에 들어옵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행동계획’, ‘정보수집 거부’, ‘기관투자자가 투자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는 원칙’이라 합니다. 지난 연말에는 식당의 피크 타임 자리를 되파는 ‘스캘퍼’가 있다는 기사도 보입니다.

신문에는 우리가 모르는 K도 있습니다. 오늘 기사에 나오는 K컬처, K콘텐츠, K배터리, K스타트업, K세신 등은 익히 알고 있는 K이지만, K디깅관광은 처음 들어봅니다. 한국인들의 실제 삶의 공간에 파고드는 관광이라 합니다.

그런데 다음 기사는 무슨 내용인지 정말 알 수 없었습니다.

 

AI 에이전트와 관련해 AI 모델을 API로 연결하고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설계하는 백엔드 개발 역량이 주목받고 있다.

방송의 언어는 더 심각합니다

신문보다 방송은 외국어 마구 쓰기에 더 앞장서 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방송에서는 외국어가 넘칩니다. ‘플리바게닝, 디지털 익사이팅, 뮤직피버, 오늘의 토킹 어바웃 추억’ 등은 머리를 어지럽게 합니다. 뉴스에서 어느 판사는 피고인 가족을 향해 ‘피고를 잘 케어해 드리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낱말에 그치지 않고 방송은 문법까지 영어를 가져다 쓰니 어리둥절합니다. 어떠한 일을 하는 사람을 ‘-러’(영어에서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 -er)를 붙여 ‘일잘러, 프로여행러, 불참러, 결심러’라 하고, 영어에서 복수 명사를 나타내는 접미사 ‘-즈’(-es)를 붙여 ‘동생즈, 친구즈, 후배즈’라 아무 거리낌 없이 쓰고 있습니다. 어떤 장관 후보자를 가리켜 대통령과의 공통점으로 ‘일잘러’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칭찬하였습니다.

미국에 있는 몇몇 독자들은 이러한 문법 파괴를 심각하게 걱정합니다. 역시 한글학회는 뭐 하고 앉아 있느냐고 호통치면서.

 

그래서 앉아 있지 않고 신문과 방송이 우리 말과 글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언론 스스로가 앞장서서 솔선수범하기를 부탁했습니다. 언론사는 모두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우리의 힘을 북돋웁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하며 매우 힘들어합니다. 첫째는 표현의 자유입니다. 오락 방송이나 드라마에서 입을 막으면 어떻게 합니까? 시청자들이 무슨 재미로 방송을 봅니까? 둘째는, 그 결과 시청률이 떨어지는데, 방송에서 시청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모르십니까?

결국 방송을 즐겨 보는 국민들에게 책임으로 돌립니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들의 우리 말글에 대한 인식이 정말 그러할까요?

 

국민들의 우리말에 대한 인식

 

식당 출입문에 OPEN이란 팻말이 걸려 있습니다. 식당 안에 들어가면, ORDER, PICK UP이 보입니다. 오후에는 Break Time이란 팻말을 붙입니다. 이렇게 해야 손님들이 멋있어 한답니다. 손님들은 훌륭한 레시피셰프가 만든 음식을 좋은 테이블에서 먹기 위해 웨이팅을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멋진 일상을 핫한 루틴이라며 즐깁니다.

 

어느 제과회사에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과자 이름을 지을 때 무엇부터 생각하느냐 물으니, 어떻게 하면 잘 팔릴까 생각한다고 합니다. 잘 팔리려면 이름부터 고상하고 세련되게 소비자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소비자의 인식은 어떠한가요? 소비자들은 우리말이 정감 있고 아름답다고 말하면서도 의식 속에는 외국어를 더 고상하고 세련된 것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기업에서는 제품을 하나라도 더 팔려고 소비자들이 고상하고 세련된 것으로 생각하는 외국어로 이름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소비자들이 우리말을 훨씬 더 고상하고 세련된 것으로 인식한다면 기업에서는 당장 우리말로 상품 이름을 지을 것이라고 자신이 있게 말합니다. 결국 우리말을 쓰고 안 쓰고는 우리 국민들의 인식에서 출발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말이 외국어에 자꾸만 밀려나고 있는 현실에서 앞으로 국민들이 지향해야 할 마음가짐은 우리말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 받들어, 우리말의 참된 가치를 인식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저는 그냥 앉아 있어도 되겠지요?

 

주시경 선생께서 1876년에 태어나셨으니, 올해는 탄생 150돌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1926년에 한글날(처음에는, 가갸날)을 만들었으니, 올해는 100돌이 되는 해입니다.

이러한 뜻깊은 해에 우리 모두는 더욱더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가치를 빛내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주시경 선생 초상화 [그림: 한글학회 소장]

일찍이 주시경 선생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한 바 있습니다.

그 나라 말과 그 나라 글은 그 나라가 홀로섬의 특별한 빛이라.

 

이 말씀을 되새기면서, 저의 글집 “말로써 행복을”은 우리 말글을 지키고 가꾸는 일에 더욱 힘쓸 것을 새해를 맞이하면서 다짐합니다.

새해 첫날의 해돋이 [사진: 해운대에서 신영 작가]